주변에 골프 좀 친다는 사람이면 안가본 이가 없는 동남아 골프여행을 실은 나는 (출장으로 가서 남는 시간에 한두번 골프장에 나가본 경험은 있으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필리핀 마닐라나 클락 주변은 가는 사람도 많지만 평가가 극에서 극이다. (남자라면) 거기는 천국이야 라는 사람들도 많지만 요즘 뉴스에서 하도 흉흉한 얘기가 들리는 동네고, 솔직히 말하자면 가족이나 주변에게 나 필리핀에 친구들이랑 골프치러 다녀올껴 이런 얘기를 떳떳하게 하기는 껄끄럽다. 아무튼 그쪽으로 출장의 기회가 생겨서 가는 김에 팀을 하나 만들었는데 다들 필리핀은 처음이라 출발하는 그날까지도 가네 마네 말들이 많았다. 나로 말하자면 밤에 술먹고 딴짓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데다가 그 위험하다는 멕시코 그런 곳에서도 지킬 거 지키면 결국 사람사는 곳이다 느꼈던 바가 있어 그저 골프나 질리도록 치겠거니 하고 출발했다.
골프치는 얘기는 (여기는 여행 블로그니까) 딴곳에다 적기로 하고... 금요일 저녁시간의, 벼라별 자유로운 복장의 한국인 남자들 아니면 필리핀 사람같이 생긴 (당연한가?) 아줌마들로 만석인 대한항공을 타면 네시간 정도 걸려서 밤늦게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는데 세간의 평가에서 세계 최악의 공항으로 손꼽히는 마닐라 제1 터미널 청사지만 (오래 걸려서 그렇지) 별탈없이 빠져나오게 되었다. 공항 외부의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다가도 경찰에게 돈을 뜯기느니 그딴 얘기를 들었던 바가 있어 아싸리 현지인 운전사를 따라가며 (마치 현지인인양) 도로변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웠다. 차를 타고 (새벽 2시에도) 막히는 고속도로를 한시간 반이 넘게 달려서 클락까지 가서 투숙한 호텔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근처에 한국사람이 운영한다는 New Koa (그러나 간판도 없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ㅠㅠ).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 거 아예 클락행 비행기로 오는 건데.. 생각을 했고, 짐을 풀고나니 밤이 늦어 나가떨어질 법도 한데 내일의 라운드가 기대되어서인지 내가 일안하고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뭐하는 건지 여러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호텔은 싼 가격을 생각하면 수긍할만 해도 그간 대체 어떤 사람들이 다녀간 거야? 와서 잠만 잘 것이지 대체 먼짓들을 하다 간거야? 괜히 남들의 수준에 개탄할 지경으로 세월의 흔적이 뚜렷했다. 여기저기 쓰레기를 채 치우지도 않은 방에서 정액 냄새가 깊게 배인 침구에서 잠을 청해보았지만 그간 내가 너무 좋은 호텔만 다녔다보다 그런 생각? 뭐, 욕실의 물이 잘 내려가지 않고, 샤워기 물줄기가 약한 정도는 남자 혼자 자는 상황에서는 큰 문제는 아니다. 아침식사도 그저 그랬지만 고급 호텔이라고 가짓수만 많아봤자 먹는 것은 빤한 줄을 아니까 그래도 밥과 김치가 있는 것이 어디냐 꾸역꾸역 먹고는 뙤약볕 아래로 나갔다. 암튼 즐거웠고, 힘들었고... 그랬다. 벌써 3월 중순인데도 아직 한국인들만 가득한 필리핀의 골프장에는 하고싶은 말도 많지만 그건 다른 곳에다가.. 이 앙헬레스라는 동네는 상상했던 이상으로 한국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곳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필리핀 사람들인데 길 양쪽으로 끝없이 나오는 한글 간판에 솔직히 어디에서든 위험하다는 느낌은 (밤늦게 마닐라 시내는 들어가보지 못해서 모름) 별로 받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앙헬레스 시내로 (여기가 시내인지는 남들 따라다니는 처지라 확신할 수는 없으나) 나갔더니 지저분하던 모습은 해가 지고나니 하나둘씩 켜지는 조명 속에 깔끔하게 바뀌었지만 술취한 한국사람들이 어디에선가 꾸역꾸역 모여든다. 나이가 들도록 유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기에 솔직히 앙헬레스 워킹스트리트라는 동네는 별천지인가 싶게 충격적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 사람들이 내 주변에서 흔히 봐왔던 평범한 이웃들인가, 그런데 저들의 눈에는 나도 똑같이 보이겠지 싶었다. 필리핀 여행에 이골이 났다는 동행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겉만 햝고 지나치는 여행객의 시각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 동네는 골프와 (남자들의) 유흥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좀 어렸을 시기에 왔더라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을라나 암튼 이런 곳도 있구나 좀 신기했다.
필리핀은 한국인 관광객에게는 3주 무비자라고 한다. 대개의 나라가 적어도 3개월은 체류하게 해주는데 비자를 받으면 되지만 돈과 수고를 피할 수 없다. 비자 비용은 필리핀 정부의 수입이 되고, 체류기간을 늘려 관광객이 늘면 그들이 쓰는 돈은 온 국민의 수입이 된다. 국민보다 정부가 우선인 나라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마닐라 공항을 통해 귀국하는데 작년까지도 따로 내야했다는 공항세를 지금은 항공료에 포함하여 받는다니 편해진 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기껏 서너시간을 자고는 새벽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피곤했으나 늦게라도 필리핀 골프여행을 경험한 것에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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