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해서 직장의 주차장에 들어가면서 나는 약간 긴장한다. 늘 같은 구역에, 가급적이면 같은 자리에 차를 세웠으면 하는데 워낙 일찍 출근하므로 대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가끔 다른 차가 세워져있으면 짜증도 나고 뭔가 하루가 고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젊어서부터 깜빡하는 저질 기억력이라 퇴근하면서 내 차가 어디에 있지? 헤맸던 적이 많아서 생긴 버릇인데 늘 열쇠도 핸드폰도 같은 자리에 두어야 맘이 편해지고, 담배와 라이터는 항상 주머니에 들어있어야 편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물론이다. 강박증이지만 맨날 깜빡하면서 고생하는 것보다야 낫지 생각한다. 그래도 이제는 슬슬 느즈막히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나와서 주차장의 빈 자리를 찾아다니는 삶도 부러워진다.
어디에선가 읽은 바에 의하면 비행기는 이륙에 가장 많은 연료를 소모하며, 기체나 운항거리, 승객의 수 등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장거리 노선의 경우 비행기의 무게에서 연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착륙에는 연료가 별로 필요하지 않겠으나 이 연료의 대부분을 써버린 상태에서 착륙하는 것을 가정하여 비행기를 설계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정에 의해서 초반에 회항이나 착륙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남는 연료를 모두 바다에 버려야만 한단다. 연료의 무게를 유지한 채 착륙하면 비행기는 그 충격을 견뎌낼 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의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뜨려면 노력과 연료가 필요하지만 안전하게 내려오려면 가진 것을 비워야 한다. 아직 내려가기에는 아쉬워서, 혹은 내려가더라도 품고 있는 무언가를 비워내기는 싫어서 우물쭈물하다가 망신을 당하고 끝이 추해지는 법이다.
그래도 아직 나는 더 싣고 올라가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착륙을 고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믿지만 점점 변해가는 주변을 바라보면서 혹시 나도 저러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이 많아진다. 게다가 너무 빨리 내려놓았다가 쓸쓸해보이는, 가진 게 없어서 무시당하는 이들도 있으니 무엇이 옳은 걸까 고민스럽다. 이제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있으니 늙어가는 모양이다.
세상의 누구도 남에게 지고 싶어하지 않고, 남보다 못났다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을텐데 평생을 너는 뭐가 문제야 남들은 너보다 더 나아 이런 얘기만 듣고 살아와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내 위치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생긴다는 현실에 갸우뚱할 때가 있다. 모처럼만에 (개인적으로는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있는) 홍콩에 "회의차" 와서 오랜만에 만나는 예전의 선생님들, 그리고 한창 연료를 채워가며 비상을 꿈꾸는 후배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까 결국엔 부끄럽지 않은 선후배로 남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도 참 오랜만인데 한때는 정말 다시 오고싶지 않았던 곳이고, 지금도 썩 유쾌하지는 않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도 무뎌져 간다. 그 시절에, 잘 지내던 예전 직장을 떠나서 이리로 옮긴 속뜻은 기왕이면 내 가족과 지인들에게 더욱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픈 욕심이었는데 아직도 때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번에 미팅에서 (또) 만난 벨기에의 모모 선생은 수많은 연구논문에 주저자이면서 전세계 학회나 미팅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유명한 의사다. 성공한 연구자다. 예전에 그가 근무하는 병원을 직접 방문한 적도 있지만 의외로 시골의 조그마한 병원이라 환자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웬만한 대규모 임상연구에는 주연구자를 하며, 덕택에 연구의 결과를 강의하러 (선전하러?) 전세계 곳곳을 누빈다. 아마도 병원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싶다. 도대체 연구자야 아니면 정치가야? 그래도 아직 나도 저런 사람이 막연하게나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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