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한 삶

카테고리 없음 2015. 5. 19. 22:30
여러 해 전에 병원의 레지던트가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는 것을 보고 우와~ 감탄한 적이 있다. 영어는 원어민 뺨치고, 저런 걸 배우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참고문헌 몇번 보고는 달달 외워서 하는 발표가 아니라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서 마치 자기가 그 연구의 저자인 것처럼 청산유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의전원 면접을 보던 기억도 난다. 지원자의 스펙은 사실 "도대체 왜 의사를 하려는 거지?" 싶게 빵빵해서 외국의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정도로는 중간에나 갈까 SCI 논문도 있고, 연구실이나 회사에서 쭉쭉 잘나가던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느꼈던 두가지: 하나는 내가 저들보다 조금 더 먼저 했기에 다행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저렇게 똑똑한 이들이 의대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어가면서 그저그런 수준으로 정체되어버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워낙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온 세대라 그런가 영어 잘하는 사람을 보면 뭐든 잘할 것 같이 오해하는 일이 잦아서 개인적으로 반성하고 있으나 아무튼 뭐든 잘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영어도 잘하는 편이다. 물론 나는 평등한 (이라고 쓰고 하향 평준화라고 읽는다) 사회에 반대한다. 저들은 분명 대다수의 타인들보다는 똑똑하고 재능이 있다. 타고난 탁월함은 부모의 들볶음이나 과외수업 만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저런 뛰어난 인재들이 결국 그 재능을 남들보다 조금 더 벌고, 예쁜 아내를 얻는 정도로 소모하고는 만족해버리는 세상이다. 앞서 언급한, 그 뛰어났던 레지던트는 (그나마 운이 좋아서) 지금 내 동료이자 후배로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일을 시켜보거나 대화를 나누게 되면 전혀 도전적이지도 창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내게 종종 혼난다). 현실에,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고 고분고분해서 시키는 일만 하려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마저도 하는 꼬라지를 보면 맘에 안 든다.


요즘의 젊은 의사들은, 그중에서도 내과, 종양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명실상부한 최고 엘리트들이며, 지난 수십년간 그 치열한 경쟁에서 한시도 선두를 놓치지 않았던 이들이다. 얘네들이 유순하게도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틈만 나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궁금한 게 생기면 학술서나 저널보다는 구글과 네이버에 의존하는 이들이 되어버렸다. 결국 세상에 쫄아버린 것이다. 당당하던 자신감과 창의력은 오직 혼나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틀에다가 자기를 넣어버린 것이다. 나? 나로 말하자면 평생을 남들보다 잘해본 적이 없어서 이 분야에서 꽤 올라간 것에 지금도 의아하고, 어째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사는 느낌이라 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롤모델이나 본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고, 똑똑한 후배를 보면 아직 경계심마저 생긴다.



그래도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 총명함이 나를 따라하다가는 완전히 망가져버리겠다는 죄책감이 들어서 그렇다. 세상이, 조직이 망해가는 이유는 나쁜 사람들 때문이기보다는 그냥 나쁜 현상을 바라보며 방관하는 자들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미팅으로 방콕에 왔지만 (난생 처음으로 방문하는 곳이라 가슴이 설레일 법도 하건만) 후배들 눈이 무서워 이번에는 골프채를 차에 놔두고 모처럼만에 양복을 차려입고 왔다. 그나저나.. 잠깐 접하는 곳이지만, 낮에 바깥에 십분만 있어도 이러다 죽겠구나 싶게 더운 곳이어도, 방콕이라는 도시에는 뭔가 탁 사람을 풀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서 나중에 놀러라도 한번 다시 방문해봐야겠다.






WRITTEN BY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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